Hungry Robot에서 전 세계 20대 한정 발매한 로우 파이 테이프 에코 에뮬레이터 딜레이 이펙터 핑크 모비입니다. '전 세계 20대'인 것 치고는 한국에 꽤 많이 들어온 것 같고 아직 (2020년 5월 6일 기준) 신품으로도 재고가 남아있으니 구하려고 마음 먹으면 구할 수 있을 겁니다.
Hungry Robot의 테이프 에코 'The Moby Dick'에는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이펙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디자인에 이끌린 것도 사실입니다. 뭐, 프로그레시브 록과 포스트 록을 애청하는 편이어서 그런지 지저분한 질감의 잔여음을 남기며 사라져 가는 테이프 에코 특유의 소리를 아주 좋아하기는 합니다.
잡담을 좀 해보도록 할까요. 제가 처음 사용해본 딜레이는 동아리방에 굴러다니던 보스의 DD3였습니다.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보스 멀티이펙터들의 성능에 자주 감탄하고는 합니다만, 보스 공간계 이펙터들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요... '그 이펙터의 기본에만 충실한다'라는 인상이 듭니다. 예를 들어 보스 코러스인 CH1은 '이게 코러스지!' 하는 소리가 납니다. 거기에 만족해서 7년째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보스 코러스만의 '색채'가 없다는 느낌이랄까요. 처음 써본 DD3는 '공공재의 비극'때문에 아웃풋 단자 접촉 상태가 메롱이기도 했고, 여러모로 취향은 아니어서 금방 동아리방에 다시 굴러다니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매드 프로페서의 딥 블루 딜레이 카피 페달을 잠깐 (중간에 긴 휴식기를 포함해 1년 정도) 사용했습니다. 회로가 단순해서인지 굉장히 자주 카피되는 페달입니다. 당시에는 테이프 에코를 지금 정도로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디지털 딜레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틱한 그 소리를 아주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소리가 '무겁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어둡다'하고는 뭔가 다른, (원본 페달을 사용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특유의 개성이 아주 강한 페달이었고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TC Electronic의 Flashback Delay를 들였습니다. 빈티지/아날로그/테이프 에코를 아주 좋아하는 지라 Alter Ego라는 다른 컨셉의 딜레이를 비교 대상에 놓고 고민을 했습니다만, 딥 블루 딜레이의 강한 개성에 어쩔 줄 몰라 새 페달을 구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중고 매물도 잘 안 나오는지라... 여담이지만 Alter Ego도 V2가 나왔는데 국내에 수입된 걸 본 기억은 없네요.
Flashback Delay의 루퍼는 애매한 정도의 레이턴시가 있어서 봉인했고, 톤 프린트 기능은... 신기하긴 합니다만 역시 실전에서 꺼내들게 되는 일은 잘 없습니다. 자주 사용하는 모드는 역시 Tape echo 모드고요, 가끔 2290이나 Analog 모드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특이한 모듈레이션 질감을 좋아하다 보니 Mod라고 적힌 모듈레이션 모드를 활용해본 적도 있고요. 한 번 RVS로 표시된 리버스 딜레이를 공연에서 활용해 본 적이 있습니다. 역재생을 라이브로 재현할 미친 생각을 하다니...
아, Valetone의 모듈레이션 16종 미니페달 Coral Mod에 내장되어 있는 Echo도 사용하고 있네요. 예전 리뷰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아주 마음에 드는 질감을 가진 에코입니다. 이게 5천 원어치 이펙터라 그러면 아무도 안 믿을... 아마 플래시백 딜레이 톤 프린트 모드 중 하나라고 하면 10명 중 9명은 그런가 보다 하고 믿을 소리가 납니다. 말고는 Meris의 Enzo를 잠깐 빌려서 테스트하다시피 사용해본 적이 있는데 (물론 딜레이라기보다는 딜레이도 되는 멀티-보이스 신시사이저 페달입니다만) 도저히 친해질 수가 없어서 돌려줬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인가, Hungry Robot의 세계 30대 한정판 Dark Moby를 접했습니다. 국내에도 몇 대 수입되었고요... 중고로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유튜브 영상으로 듣는 톤은 '이거다!' 싶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 여유가 없어서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다 놓쳐버리고 말았지요.
저만 아쉽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2020년 기념 20대 한정 Pink Moby가 나왔을 때, 저는 '이런 소리나는 이펙터와는 정말 안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Dark Moby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요. 그래서 Dark Moby를 기다리며 잠복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Pink Moby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첫인상은 음... 앞면 뒷면의 그림이 아주 귀엽습니다. 이건 헝그리 로봇 공통 특징이니 넘어가고요. 도색은 뭔가 불균일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보일지도 모릅니다. 판매처 여기저기에 '본 제품은 수작업으로 제작되어...' 어쩌고 하는 주의사항이 적혀있으니 그런가 보다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무발이 없다는 사실은 아주 마음에 드네요! 어차피 페달 구입하면 테스트해보고 벨크로 부착해서 페달 보드에 장착하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페달 이펙터는 고무발 없이 출시하거나, 스티커 또는 설명서처럼 굿즈로 끼워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판매처 사진들 보면 원래 없는 거 같은데, 원래 없는 게 맞겠죠? 아님 말고요...
그래도 뒷면에 Dark Moby라고 매직으로 쓰여있는 글씨를 보니 벨크로 붙이기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단 배터리 연결해서 테스트를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감동했습니다. 세계에 20개 밖에 없는 페달을 제가 갖고 있다는 사실도 '감히...'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정말 제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페달이었습니다.
귀찮아서(...) 리버브가 앞 에코가 뒤라는 괴상한 조합이었습니다만, 어마어마한 톤이 나왔습니다. 보통 유튜브에서 듣던 소리를 기대하며 페달을 들였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직접 듣는 톤이 훨씬 좋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질감의 딜레이를 이 정도 사이즈 이 정도 가격대에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국내 판매처들 보니 일반 모비딕이나 한정판 핑크 모비나 가격이 똑같은데 취향따라 구입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테스트라는 걸 잊고 한참 몰입해서 정말 즐겁게 연주를 했을 정도로요.
다만 개성이 아주 강합니다. Dark Moby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아무 데나 끼워 넣을 수 있는 페달이라는 느낌은 아닙니다. Mod노브나 Lo-Fi노브를 0으로 설정해도 이미 개성 강한 페달인데, 이 페달을 그렇게 사용하고 싶지는 않네요. 뭔가 '이 페달을 사용한 곡을 쓰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매력적인 특색이 있는 이펙터였습니다. 진지하게 페달 보드에 장착할까 고민을 했지만, 밴드에서 욕먹을 것 같아서 자제했습니다.
헝그리 로봇 모비딕을 알아보고 있는 단계라면, 이미 어느 정도 음악적 방향성이 확고한 상태일 거라 생각합니다. 다크모비와 핑크모비는 거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다크하고 모듈레이션 느낌 강하고 지저분하게 사라지는 테이프 에코의 질감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핑크 모비를 테스트하다가 플래시백 딜레이의 Tape 모드를 사용해보면 과육이 씹히는 생과일주스와 설탕물 정도의 차이가 있네요. 진짜 마그네틱 테이프가 돌아가는 테이프 에코를 사용해본다면 얼마나 감동하게 될지 감도 안 잡힙니다만, 본인 취향은 강렬한데 주머니 사정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주 좋은 선택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메인 장비로 정착하지는 못해도, 꾸준히 사용하게 될 것 같은 페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페달의 개성을 살린 곡을 많이 만들게 된다면 메인 장비로 정착할 수도 있겠죠...? 이번에도 대면기라 사운드 샘플이나 영상은 없습니다만, 유튜브에 이미 다크 모비 영상 및 비교 영상들이 꽤 올라와있으니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삿말처럼 '저한테는 과분하지만...'을 붙이게 되는지라 식상할 수도 있겠지만, 진심으로 저한테는 과분한 장비를 오랫만에 만났습니다. 잘 활용해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대면기는 그만하고 좀 더 의미있는 컨텐츠로 찾아뵙고 싶네요. 그러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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