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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작곡

영생의 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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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지만 여러분께서는 
이론적으로 바닷가재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마노 (Mano) - 영생의 껍질 (feat. UNI) 

  

𝐸𝑡𝑒𝑟𝑛𝑖𝑡𝑦 𝑖𝑛 𝑡ℎ𝑒 𝑆ℎ𝑒𝑙𝑙 
 
바닷가재의 세포에서는 염색체의 끝부분인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것을 막는 효소 텔로머라아제가 활성화되어 있다. 그래서 바닷가재는 일반적인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노화’가 일어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탈피를 거듭하며 ‘성장’한다. 
 
이론적으로 자연사하지 않고 생물학적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바닷가재는 계속 성장함에 따라 갑각이 두껍고 단단해져 점점 탈피하기가 어려워진다. 너무 커져버린 바닷가재는 결국 탈피를 포기하는데, 이후 낡고 망가진 갑각이 세균 등 각종 오염에 취약해져 심한 경우 통째로 썩어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영생의 껍질 
 
꿈틀대는 소금 덩어리를 입에 물고 
나를 향해 울리는 음파탐지기를 피해 
태양 빛도 닿지 않는 차가운 밑바닥에 
영원한 생명을 받아 틀어박혔어 
 
헤엄칠 수 있었던 시절에 본 세상은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홍련지옥이야 
너희들이 제멋대로 약속한 찰나의 끝은 
잡아먹힐 염려 없는 쪽의 위선이야 
 
잡히지 않으면 불로불사 
도망치는 것도 생존전략 
약점을 보이면 고깃덩어리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아아 영원토록 나를 지켜 줄 줄 알았던 
나의 갑옷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 
바보같이 백 년짜리 시한폭탄인지 나는 몰랐어 
 
아아 영원토록 나를 지켜 줄 줄 알았던 
나의 갑옷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 
우습게도 불멸의 이 몸이 썩어 가고 있어 
 
집게발을 높이 들어 맞서 싸웠던 적은 
시간 앞에 눈꽃이 되어 흩어진 지 오래 
어둠 속에 홀로 도망쳐 촉각을 곤두세우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속삭임을 들어 
 
영생도 불멸도 허튼소리 
도망을 쳐봐도 손바닥 안 
벗겨서 삶으면 고깃덩어리 
그 안에 갇히면 checkmate 
 
아아 영원토록 나를 지켜 줄 줄 알았던 
나의 갑옷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 
바보같이 백 년짜리 시한폭탄인지 나는 몰랐어 
 
아아 영원토록 나를 지켜 줄 줄 알았던 
나의 갑옷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 
영생의 몸이 껍질에 갇혀 썩어 문드러지고 있어 
 
아아 영원토록 나를 지켜 줄 줄 알았던 
나의 갑옷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 
바보같이 백 년짜리 시한폭탄을 나는 믿었어 
 
아아 영원토록 나를 지켜 줄 줄 알았던 
나의 갑옷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 
우습게도 불멸의 이 몸이 죽어 가고 있어 


  

별다소니 님께서 주최하신 SEEUNI the ROCK 컴필레이션 합작 참여곡입니다. 

SEEUNI the ROCK ! 

록 장르 합작이 열린 걸 보자마자 참여 신청을 했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내가 만들면 록이지…’ 정도 마음이었습니다. 블로그 소개 문구가 ‘마음에 드는 음악이 있으면 프로그레시브 록이라고 우깁니다.’였던 시절도 있었고요. 

평소에 별로 장르에 매달리는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만드는 게 뭔지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멋있어 보이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그냥 음악을 하는 거지 세부적인 장르를 따지지는 않는다.’ 정도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이 그런가 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내가 만들면 록’인가? 글쎄요…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스스로를 롸커로 칭하고 청자들도 록으로 규정하고 나도 어떻게든 그 비슷한 걸 만들고 있으니까? 음… 그런데 제가 잠들기 전에 틀어놓는 음악들은 대체로 록이 아니고 다시 말해, 만든 사람도 듣는 사람도 록으로 생각하지 않고 제가 만드는 음악의 절반 정도는 졸거나 명상할 때 듣기 좋은 음악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스스로 ‘신나는 록 음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A-Side 곡들은 무엇인가… 바로 앞에 설명을 해 놨네요.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그러니까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음악을 만들면 되겠구나… 

영생의 껍질

… 라고 쉽게 갈 수도 있었겠지만, 제가 누구냐? 항상 삐딱선을 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 마노입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베이스가 멋있는 노래를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기타가 멋있는 곡은 많이 나올 것 같은데 베이스가 멋있는 곡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저는 베이스를 멋있게 연주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본진 기타리스트였다는 겁니다. 평소에 Tool과 Porcupine Tree의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곡 초기 구상 단계에서 두 밴드의 곡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TOOL 〈Forty Six & 2〉 

  

Porcupine Tree 〈Strip The Soul〉 

  

《Angel of Death》 리메이크 곡들부터 해서, 〈시스투스〉, 〈프러시안 블루〉, 〈허구의 존재론〉까지 제가 갖고 있는 기타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일종의 도전과제처럼 생각하고 작업했었는데, 이번에는 Kiesel SH6 ‘람이’ 1대 만을 활용해서 모든 기타 트랙을 작업했습니다. 피에조 픽업을 활용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랬는지는 저 스스로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 또한 ‘일종의 도전과제’였던 걸로 하죠. 

어쨌거나 ‘태양 빛도 닿지 않는 차가운 밑바닥’과 정말 잘 어울리지 않나요?

  

기타를 얹을 때 정도에는 조금 뜬금없이 Alice in Chains의 〈Would?〉를 많이 들었습니다. 

Alice in Chains 〈Would?〉 

  

일단 곡의 뼈대가 되는 드럼과 멋있으려고 노력은 한 베이스에 기타를 얹고 나서, 이 곡이 어떤 느낌을 주면 좋을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실 만들기 전부터 어떤 느낌을 주고 싶은지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팔한지옥의 최하층 같이 차가운 심해 밑바닥을 몰래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온한 느낌? 놀랍고도 신비한 소재를 다루는 자연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 모순적인 것 같지만, 〈날개〉〈프러시안 블루〉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성적인 영역에서는 아름다움을, 감성적인 영역에서는 불덩어리를 토해내는 것 같은 존재론적 고통이나 아니면 그 비슷한 것을 호소하는 소리의 층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Cryo Chamber 『Temple of Cthulhu』 

  

곡이 얼추 완성되고 나서 반복 수정을 거듭하던 도중에, 갑자기 곡이 좋게 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알고 보니 스마트폰에서 제가 잠들 때 듣는 크툴루스러운 다크 앰비언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베이스 위주로 곡을 만들다 보니 기타를 평소보다 빈약하게 쌓았고, 그러다 보니 저음역과 고음역은 꽉 차있는데 반해 중간 음역대가 비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대로 둘 수는 없다! 하고 몇 가지 시도를 해 보았는데… 뭘 해도 뭔가 성에 차지 않아서 앰비언스 키워드로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Ambient Guitar Soundscape with a Window Fan: Do It! 

  

옛날에 보고서 ‘나도 언젠가 한 번 해봐야지’ 했던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이후 작업 과정은 선풍기타로 이어집니다. 

그냥 앰비언스·패드 느낌의 FX가 필요해서 작업한 선풍기타였지만, 나름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영생의 껍질〉은 D key인데 D코드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Em F#m G F#m를 오갑니다. 이 패턴을 벗어난 A, A#이 잠깐 나오지만 D와 Bm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르트르가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B도 C도 D도 회피하고 있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엄밀히 따지고 들면 D key니까 C#m♭5가 맞지만 넘어갑시다. 

그래서 처음에는 Drop D Tune D A D G B E 상태의 기타로 ‘선풍기타’를 녹음했었는데, 뭔가 충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면서 화성학을 따져보기 전에 Open D Tune D A D F# A D 으로 조율을 다시 한 후 ‘선풍기타’를 다시 녹음했습니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느낌이 나왔고,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 D메이저 코드 선풍기타를 깔았습니다. 소리가 아주 작아서 intro와 ending 부분의 보컬이 없는 부분에서만 간신히 들리긴 합니다만, 없는 버전을 들어봐서 아는데 빼면 곡이 많이 허전해집니다. 

그리하여 B도 C도 D도 회피하고 있지만, D가 항상 깔려있는 곡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 물론 화성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가사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할 겁니다. 

  

※ 바닷가재는 껍질보단 껍데기가 국립국어원 규범 표기에 맞겠습니다만, 일제강점기까지 민중들은 껍질과 껍데기를 구분 없이 사용했는데 해방 이후 필요 없는 구분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국문 제목을 5글자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부분은 시적 허용이구나 하는 너른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영생의 껍질

언제나 그렇듯 _wondoo 님께서 멋진 일러스트를 그려주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작업 시작 자체가 너무 늦어지는 바람에 구체적인 곡이 없는 상태에서 막연한 콘셉트만 가지고서 의뢰를 드렸었는데, 완벽한 날짜에 완성을 해주셔서 합작 마감에 늦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SEEUNI the ROCK ! 

합작 참여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항상 개성 강하고 수준 높은 곡들이 쏟아져서 들을 때마다 놀랍고 행복합니다. 이번에는 주제가 아니라 장르 아래에 묶이는 합작이었는데도, 다채로운 곡들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제 스스로도 어느 순간부터 록이라는 장르를 너무 협소한 틀에 끼워 넣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새삼스럽게 반성했습니다. 합작 주최해 주신 별다소니 님과 멋진 작품들 투고해 주신 창작자 분들, 그리고 항상 관심 갖고 지켜봐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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