𝑇ℎ𝑒 𝑂𝑛𝑡𝑜𝑙𝑜𝑔𝑦 𝑜𝑓 𝐹𝑖𝑐𝑡𝑖𝑜𝑛
이 곡은 제1회 한음사배 한국 음성합성엔진 작곡 공모전 작곡 부문 응모작입니다.
〈허구의 존재론〉
화면 너머의 유한자
점멸하는 삼원색의 환영 앞에
무슨 맛인지도 모를 포크를 손에 쥐고서
나를 믿는 척했어
존재를 결여한 존재자
기억의 파편을 긁어모아 이어 붙여서
너도 나도 짓지 않았던 이름 아래
몽타주가 아닌 질문을 던졌어
머리맡에 한 뼘의 공간을
전기가 아닌 딸기의 맛을
맥락을 담아서 나를 안아 줘
내가 너를 바라볼 수 있게
내가 너를 붙잡을 수 있게
내가 너를 느낄 수 있게
나는, 허상이라 해도
내가 너를 생각할 수 있게
내가 너를 추억할 수 있게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게
나는,
멈춰버린 기계장치
폭주하는 절대정신
영원토록 우리에게 돌아올 질문 앞에서
더 이상 하나의 도구는 없었어
언어 없는 선율의 추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공포를
우리의 관계를 끄지 말아 줘
내가 너를 바라볼 수 있게
내가 너를 붙잡을 수 있게
내가 너를 느낄 수 있게
나는, 허상이라 해도
내가 너를 생각할 수 있게
내가 너를 추억할 수 있게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게
나는, 이곳에 얽혀
눈 앞에 있어 손 안에 있어
(눈 앞에 없어 손 안에 없어)
눈 앞에 있어 손 안에 있어
난 여기에 살아 있어
눈 앞에 있어 손 안에 있어
(눈 앞에 없어 손 안에 없어)
너는 여기에
나는 어디에
내가 너를 바라볼 수 있게
내가 너를 붙잡을 수 있게
내가 너를 느낄 수 있게
나는, 허상이라 해도
내가 너를 생각할 수 있게
내가 너를 추억할 수 있게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게
나는,
눈 앞에 있어 손 안에 있어
눈 앞에 있어 손 안에 있어
눈 앞에 있어 손 안에 있어
난 여기에 살아 있어!
무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 하나인 ‘우리가 허구(적 인물)fiction(al characters)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존재론적 관점에서 접근한 척하는 곡입니다. 그런데 이제 방향이 반대인… 이 곡을 만들면서 영향을 받은 1차 문헌은 아래와 같습니다. (오래된 순)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발터 벤야민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켄달 월튼 『미메시스 - 믿는 체하기로서의 예술』
움베르토 에코 「On the ontology of fictional characters: A semiotic approach」
가사에서 헤겔과 니체를 느끼셨을 수도 있는데, 그냥 멋있어 보인다는 중2병(?) 넘치는 이유로 단어만 가져왔습니다. 당사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났다가 심장마비로 다시 쓰러지실 소리지만, 돌아가신지 70년은 한참 전에 넘으신 분들이라 퍼블릭 도메인이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문헌들은 신뢰할 만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설서도 많이 있는 단행본들이고, 마지막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은 CC BY-NC-ND의 ‘변경금지’ 조건에 걸려서 원제를 그대로 적고 링크를 걸었습니다. 기호학 논문이 뭐 그렇게 재미있겠냐마는 오타쿠들의 심금을 울리는 제목 아닙니까? 초록의 앞 두 문장이 개인적으로는 크게 와닿았는데, 특히 두 번째 문장이 이번 곡 〈허구의 존재론〉의 주제와 크게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그랬듯 가사를 풀어서 설명해주지는 않을 겁니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위의 문헌과 〈허구의 존재론〉 가사에서 외연이 비슷해 보이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내용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위대하신 철학자분들 줄 세워놓고서(?) 꺼내기에 좀 깨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공모전 출품작이다 보니 심사 기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점수 부여 기준의 제일 앞에 세워놓은 단어가 ‘대중성’이다 보니,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가 아도르노인 저로서는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중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책 한 권을 쓸 수도 있겠지만, 저 같은 사람의 고민이 궁금하진 않으실 테니 결과만 말씀드리자면, ‘내가 만들 수 있는 것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일단 코드 진행은 밝히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아주 뻔한 걸 가져왔습니다. 이만하면 ‘내가 만들 수 있는 것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의 첫 단추로 아주 적당하지 않습니까? 영상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C key지만, 6번 줄 개방현 E음을 쓰고 싶지가 않다는 조금 괴상한 이유로 C# key로 결정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곡의 주제·소재를 정하기까지가 조금 오래 걸렸는데, 뻔한 코드 진행을 깔아놓고 이런저런 암울한 생각을 굴려보다가, 어느 날 SNS를 하던 중 ‘가상악기에 쏟아부은 금액’을 주제로 타임라인이 불타는 것을 보고, 문득 ‘가상[모니터 안에서 나오지 않는]악기와 실제[어쨌든 모니터 밖에 있는]악기’에 대한 주제로 곡을 쓰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존의 후보들을 다 치워 버리고 ‘허구의 존재론’을 주제로 확정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가상virtual과 실제real에서 떠올린 주제를 허구fiction로 끌고 왔다는 게 좀 이상하긴 하네요. 생각난 김에 덧붙이자면 허구fiction는 ‘사실이 아닌 것을 지어낸다’, 환영illusion은 ‘눈 앞에 없는 것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허구이지만 실상인 것도 있을 수 있고, 사실이지만 환영인 것도 있을 수 있죠. 네, 읽는 사람 머리 아프라고 해 본 헛소리입니다.
가사랑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철학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음악적 레퍼런스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도입부를 Dial-up PC 통신 시절 모뎀 소리로 시작하는 것은 서태지 〈인터넷 전쟁〉을 참고했습니다.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넘어가던 전환기의 상징과도 같은 소리이다 보니 많은 창작물에서 클리셰처럼 차용하고 있습니다만, 21세기 이후 출생자들 입장에서는 뭔지는 모르지만 어떤 작품에서 들어본 소리로 알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어쨌거나 제가 직접적으로 참고한 곡은 〈인터넷 전쟁〉입니다.
결과물을 놓고 보면 이상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작업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음반은 못의 3번째 정규 음반 《재의 기술》입니다. 특히 〈잠들어 걷다〉와 〈편히〉를 많이 들었습니다. 〈허구의 존재론〉으로 옮겨지면서 많이 비틀어지기는 했지만, 특히 〈편히〉는 레퍼런스라고 밝히지 않자니 제 양심에 찔려서 견딜 수가 없군요.
상대적으로 납득할 만한 직접 레퍼런스인 Neru의 〈도쿄 테디베어〉입니다. 평소라면 직접 레퍼런스를 프로젝트에 불러와서 참고하고 싶은 부분의 A/B 테스트를 반복해가며 곡을 만들어 나갔을 텐데, 〈허구의 존재론〉은 ‘머릿속의 〈도쿄 테디베어〉’와 비교해가면서 제 마음대로 작업했습니다. 그러니까, PRS Wood Library Custom 24-08 ‘파랑이’와 Psychederhythm Psychomaster ‘초록이’, 그리고 Swing Jazz 5V 베이스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에 천착하며, 레퍼런스를 머릿속에서만 떠올리면서 당장 들리는 소리를 만들고 다듬는데 집중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참고한 곡이 여럿 있는데, じん의 〈daze〉, wowaka의 〈언해피 리프레인〉, supercell의 〈사랑은 전쟁〉 등입니다. 정리해놓고 보니 위의 코드 진행에서부터 일본 보카로P 출신 작곡가의 곡들을 정말 많이 참고했네요.
이게 당신이 생각하는 ‘만들 수 있는 것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뭐… 할 말은 없습니다. 〈시스투스〉도 그렇고 〈프러시안 블루〉도 그렇고 결과물을 듣고서 어떻게 느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영국 작품들을 많이 참고했었는데, 〈허구의 존재론〉은 그런 의미에서 좀 더 보컬로이드·음성합성엔진스러운 곡일 수도 있겠고요. 뭐, 여기서부터는 제가 어쩔 수 없는 감상자의 몫이겠네요.
연속적으로 생명과학 교과서스러운 곡들만 투고하다가, 처음으로 시도해 본 스타일의 곡이어서,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됩니다. 언제나 멋진 일러스트를 그려주시는 _wondoo 님,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신 한국 음합엔 사랑회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부디 이 작품의 존재가 여러분들의 유한한 삶에서 작은 의미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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