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은 현재 폐쇄된 제 네이버 블로그에 2018년 7월 4일 업로드한 글입니다.
※ 당연히 현 시점(2020년 2월 17일)의 저와 과거의 저는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에 쓴 글을 보존하는 의미로 원문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 했습니다. 아래 글을 읽을 때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방치해놨던 블로그에 첫 글을 쓰려고 하니, 워드프로세서 흰 창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고 있을 때와는 다른 차원의 막막함이 느껴지네요. 나름 계획해둔 건 많았는데, 그냥 제일 편한 주제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자작곡입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기준으로 제가 지금까지 작업한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별로 대단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이 곡에 관해서는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 알고, 제일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 글로 써 보기로 했습니다.
※ 이 글은 제가 <나비의 일생>과 그것을 개선한 버전인 <나비의 일생 2018>을 만들면서, 어디서 영감을 받고, 무슨 의도로 이 곡을 만들었는가에 대해 쓸데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악의 감상에서 원곡자의 의도보다 감상자의 해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원곡자의 시시콜콜한 개인사 때문에 감상을 망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글을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2011년 여름이었습니다. 그때 비가 많이 왔습니다. 저는 고등학생이었고, 그날은 방학식 날이었습니다. 방학 때는 기숙사에 살지 않을 작정이었기 때문에 짐을 다 뺐고, 집에 가는 길에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렀었습니다.
식당 문 앞에서 제비나비를 보았습니다. 꽤 굵은 빗방울 사이로 날아다니는 제비나비였습니다. 흐린 하늘도, 굵은 빗방울도, 나비의 검은색도, 별로 좋은 상징은 아니었습니다. 제 눈에는 그 작은 나비 한 마리에 온 우주의 죽음이 교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저렇게까지 사는가?"
별로 좋은 질문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때는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 질문은 계속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비의 일생>은, 이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곡입니다.
이후 대학생이 되어서는 밴드에 들어가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다가, 깔짝깔짝 이런저런 코드 진행이나 리프 같은 걸 만들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초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서 작곡을 한답시고 이런저런 악보를 그리곤 했다는데,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악보도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본격적인 작곡은 대학 들어와서 시작했으니까 그냥 그런 걸로 해 두겠습니다.
워낙 나비의 이미지가 강렬했고, 이 곡의 뼈대를 이루는 EM7-AM7과 EM7-DM7-CM7-Bm7-Am7 진행은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메이저 세븐스 코드는 살짝 불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거의 스쳐가듯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 불안함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화성학 지식은 어릴 때 피아노 학원 다니면서 배웠던 게 거의 전부라 저 코드 진행이 학문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곡의 퍼즐 조각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구상해나갔습니다.
그리고 2014년 말에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구입하고서, 몇 개의 테스트 느낌의 녹음을 제외하면 가장 처음 작업하기 시작한 곡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완전히 독학이었기 때문에 작업이라기보단 시행착오의 연속에 가까웠지만...
그때는 포큐파인 트리와 마이크 올드필드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열심히 듣고, 좋아합니다.) 특히 마이크 올드필드의 《Tubular Bells》시리즈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악기의 소리를 다 들려주기라도 할 것처럼 차분하게 악기 소리를 쌓아가다 해체하다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모든 악기가 모였을 때의 경이롭고 장엄한 느낌을 정말 좋아합니다. 영상은 1998년에 발표된 음반 《Tubular Bells Ⅲ》 결말 부분의 라이브입니다.
'마이크 올드필드 같은 느낌으로 곡을 써야지!'하는 생각으로 작업을 한 건 아닙니다만, 하다 보니 결국 영향을 많이 받게 된 측면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때는 믹싱도 할 줄 몰랐고, 어떻게든 쌓아놓은 기타 소리와 가상악기와 빗소리에 이런저런 이펙터도 걸어보고, 대략 8개월에 걸쳐 애는 써 봤습니다만,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결국은 '잡음과 툭툭 튀는 소리는 대체로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라는 무책임한 문구 한 줄과 함께 2015년 9월에 이 곡을 사운드 클라우드에 업로드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곡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입니다만, 그래도 저는 이 곡 <나비의 일생>을 정말 좋아합니다. 특히 세 번째 파트인 <죽음>(5분 이후)에서 글로켄슈필을 감싸듯 현악기와 빗소리가 도입되는 부분은, 이걸 정말 내가 만든 게 맞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군대를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항상 이 곡이 숙제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여전히 전문적인 음향 지식이나 기술은 전무한 수준입니다만, '다시 녹음해야지, 다시 작업해야지'하고 말입니다.
음, 오랜만에 다시 꺼내보니, 이건 정말 아니었습니다. 다듬어서 어떻게 해결될 수준이 아니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는 처참한 수준...?
우선, 저는 저를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은(작곡 등은 부차적인)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기타 이야기입니다. 2015년에는 사진에서 뒤에 보이는 주황색 2009년식 PRS Custom 24(주황이)로 녹음을 했습니다만, 이번에 전역 기념으로 새로 들인 파란색 2016년식 PRS Custom 24-08(파랑이)로 모든 기타 소리를 다시 녹음했습니다. 기타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파랑이는 픽업과 일렉트로닉스도 다르고, 무엇보다 메이플 넥에 에보니 지판 조합인 특이한 악기라서 소리가 밝고 차갑고 깔끔한 느낌입니다. 마호가니 넥에 로즈우드 지판 조합인 주황이와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나비의 일생>의 주제가 '생명에 대한 우주의 냉혹함', '피할 수 없는 죽음, 허무한 삶' 정도이기 때문에, 따뜻한 느낌을 주는 2015년 버전의 기타 소리에 비해서 냉정한 느낌을 주는 지금 기타 소리가 더 마음에 듭니다. 물론 이런저런 장비와 이펙터를 추가로 더 들인 것이 기타 톤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사운드에 대한 취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믹싱에 대한 지식이나 능력은 처참한 수준이고, 그냥 귀를 믿고 어떻게든 기본 플러그인을 만지는 수준입니다만, 지난 3년간 주워들은 게 있다 보니 나름대로 발전했다고는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 한 사람인 Steven Wilson의 <Significant Other>란 곡입니다. 분명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을 뽑으라고 한다면 이 곡은 아닙니다만, 저는 이 곡의 사운드를 정말 좋아합니다. 우선 기타 소리는 축축한 아르페지오 소리와 거기에 디스트 걸어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강렬한 소리가 들리는데, 둘 모두 취향입니다. 그리고 곡 전체를 부유하는 금속성의 이디오폰이 울리는 소리도 좋아합니다. 음... 그러고 보니, 제가 지금까지 작업한 곡은 대체로 일렉트릭 기타를 뼈대로 하는 축축한 배경을 깔아놓고 글로켄슈필, 실로폰, 벨 같은 금속성의 이디오폰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곡이 많은 것 같습니다.
카게로우 프로젝트의 애니메이션 『메카쿠시티 액터즈』 4화의 삽입곡 <망각의 여름>입니다. 『메카쿠시티 액터즈』 OST 중 드물게 외부 작곡가가 아닌 카게프로의 원작자 진(じん)의 곡이기도 합니다. 몽환적인 기타 소리를 여러 번 겹쳐서 만든 곡인데, 이 곡의 느낌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스틸 권선의 기타를 연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나는데, 이 곡은 그 소리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금속성 소리는 분명 호불호가 갈리고, 레코딩 기술이 워낙 발전했다 보니 음 단위로 끊어서 녹음한 다음에 이어붙이는 기술을 사용한다거나 EQ와 이런저런 이펙터로 만진다거나 해서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만(그보다 애초에 의도치 않은 소리가 녹음되지 않는 편이 가장 좋겠습니다만), 저는 이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이 좋아서 <나비의 일생 2018> 두 번째 파트 <일생>의 기타 톤을 이런 느낌으로 잡았습니다. 기타 줄 긁는 소리를 포함해서요.
이 곡은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2분 36초까지의 <우화>, 이후 5분 00초까지의 <일생>, 여기서부터 8분 54초까지의 <죽음>입니다. 2015년 버전과 2018년 버전의 형식 자체는 완전히 같습니다.
<우화>는 나비가 번데기에서 탈피해, 젖은 날개를 펴고, 마침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곡으로 옮겼습니다. 주변 몇 사람이 이 곡을 듣고 '다큐멘터리 삽입곡 같다.'라는 평을 많이 했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생>은 나비 성충의 일생을 곡으로 옮겼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비는 춤추고 꽃은 방긋 웃는다.'라는 표현을 싫어합니다. 나름대로의 생존경쟁을 인간 입장에서 너무 쉽게 보는 것 같아서요. 초등학생일 때 석주명에 관해 배우면서 '나비는 항상 같은 길로만 날아다니므로, 그 길목에서 기다리면 원하는 나비를 채집할 수 있다.'라는 잡지식을 바탕으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느낌의 곡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꽤 어려웠습니다. 2015년 버전에서 가장 성에 안 찼던 게 <일생> 파트입니다. 특히 기타 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었습니다. (저는 무슨 곡이든 기타 소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뭐, 이번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만, 위에서 설명한 여러 음악들과 비슷한 느낌의, 개인적인 의도에 훨씬 가까워진 소리라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말 그대로 나비의 죽음입니다. 이 부분은 작곡하면서 여러 번 수정을 가했었는데, 심지어 블랙메탈을 삽입하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가장 내용물이 없는 버전이 되었는데, '한 생명의 죽음이란 것이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다룰 만한 건 아니다.'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비 한 마리를 죽이는 데는 태풍도, 천둥번개도 필요 없다. 그저 약간의 빗방울이면 충분하다."
...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글로켄슈필로 연주하는 죽음의 테마가 흐르고, 거기에 나비에 교차하는 '죽음'인 빗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은 엉뚱하게도 <일생>의 드럼 반주를 기반으로 한 <우화>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마이크 올드필드처럼 나열식으로 제시되던 음들이 최후에 이르러 하나의 곡으로 완성되는 느낌을 주고 싶었고, 의미적으로는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과 죽음은 언제나 맞닿아있다.'라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나비가 연상되었다면 성공인데, 어떻게 들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더 깔끔하게, 더 의도한 바에 가깝게 들리도록 부품을 갈아 넣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단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악보상 달라진 부분은 없습니다. 어디가 달라졌냐고요? 그건 감상의 재미로 남겨 두겠습니다.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결국 '왜 저렇게까지 사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별로 좋은 질문도 아닙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은 좋은 화두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라.'라는 석가모니의 답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저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저를 괴롭힐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비의 일생>은 제가 첫 자작곡도 아니고, 가장 최근의 곡도 아닙니다. 분명 처음 녹음이란 걸 시도했던 곡이긴 합니다만, 결과물을 놓고 보면 그게 그렇게까지 의미 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 조잡하고 거친 곡이 저에게는 꽤나 위로가 됩니다. 가끔 어쨌거나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서글퍼질 때 저는 이 곡을 듣습니다.
여기까지가 <나비의 일생 2018>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음, 이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블로그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아서 일기 쓰듯이 써 봤습니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곡을 혹시라도 들으셨다면, 그리고 거기에 사족처럼 덧붙은 이 글까지 읽으셨다면,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가 블로그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이 글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정리하는 느낌도 겸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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