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글을 많이 쓰자고 작정하고, 근 한 달 정도 나름대로 잘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웬만하면 통계에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자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래도 신경을 쓰게 됩니다. 지난달 조회수가 가장 높은 게시물이 기계식 키보드에 관한 글 두 편이더군요(...)
기계식 키보드에 관해서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많이 사용해 본 것도 아니고, 그냥 기성품 중에 유명하고 좋아보이는 거 몇 가지 사용해보면서 '오 진짜 좋은데 이거?' 정도 생각해 본 게 전부라, 정말 영양가 없는 글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갖고 있는 키보드들에 관해 좀 더 자세하게 글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저의 입문 기계식 키보드인 레오폴드 FC900R PD 갈축입니다.
저는 사실 컴퓨터에 그다지 관심도 없고 지식도 없고, 그러다 보니 주변 장비 욕심도 없는 편입니다. 키보드도 그냥 있는 거 쓰는 타입이었는데, 쉽게 구할 수 있는 멤브레인 키보드나 노트북 팬터그래프 정도 사용해 봤겠네요.
그러다가, 작년 들어서 키보드 입력이 씹히거나 두 번 입력되는 현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찾아보니 멤브레인 키보드 러버돔이 노화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그냥 멤브레인 키보드 하나 샀으면 해결되었을 문제인데... 왠지 그러기가 싫더군요. 코로나 사태 이후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무지 길어지기도 했고, 무언가 저질러야 할 것 같은 욕구불만(?)에도 시달리고 있었고, 주변에 컴퓨터 주변 장비에 관심있는 지인들이 사용하는 기계식 키보드인가 뭔가 하는 걸 한 번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계식 키보드는 진짜 완전 입문이다보니 타건을 해 보고 사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여러모로 여의치가 않았었습니다. 아마 요즘도 비슷할 것 같네요. 아무튼 짧게 경험해 본 대표 스위치인 체리 청축/갈축/적축에 대한 인상은 시끄러움/오 얘가 제일 낫다/재미없음이었습니다. 제목에 언급해놨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첫인상입니다!
제가 키보드를 선택한 기준은... 우선 저는 게임을 안 하기 때문에 게이밍 장비로 굳이 올라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LED나 장식적 디자인이 최대한 없는 쪽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이 선에서 굉장히 많은 회사/제품들이 걸러졌고. 최종적으로 레오폴드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① 무난하고 단정한 디자인 ② 성능과 가격이 비슷하면 국산 기업 정도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레오폴드 갈축을 구매하자고 정하고, 모델을 정해야 했는데, 딱히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사용하는 DAW 프로그램인 큐베이스 주요 단축키들이 넘패드에 할당되어 있다 보니 텐키리스나 미니 배열들은 일단 제외, (당시만 해도) 한글 없는 키보드는 도저히 못 쓸 것 같아서 한글 모델, 그러고 나니 FC900R PD 한글 모델만 남았습니다. 이제 색상 고르는 문제였는데, 당시 재고가 있던 모델들 중 애쉬 옐로우가 가장 마음에 들어서 그걸 골랐습니다.
레오폴드 본사 홈페이지에서 주문했는데, 잘 포장되어서 우체국 택배로 옵니다. 미니 5핀 타입 케이블에 대해 불만이 아주 많던데... 솔직히 뭐가 불편한지 잘 실감은 안 납니다. 끼워주는 키캡 리무버는 사용했다가 키캡에 흠집 생기는 거 보고 바로 와이어 타입 키캡 리무버 하나 샀습니다. 말고는 보증서 하고 플라스틱 덮개 정도 끼워줍니다. 얘네들에 대해서는 뭐 딱히 할 말이 없네요.
기계식 키보드를 사고 나서 달라진 점은, 타자 치는 게 너무 재미있어졌다는 겁니다. 이전까지 좀 마구잡이로 타자를 하고 있었는데 (왼쪽 시프트 키만 사용, 오른손 소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음) 타자 연습이 너무 재미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점이 다 교정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여전히 속타는 못 합니다만(...) 참고로 저는 키보드를 하루 종일 사용해야 하는 유형(작가라거나 프로그래머라거나)은 아닙니다.
이제 대략 반 년 정도 갈축을 사용하면서 느낀 사용기를 간략하게 작성해보겠습니다.
한국에서 갈축은 주로 넌클릭(non-click)으로 불리는데, 이 명칭 때문인지 클릭에서 소리를 제외한 느낌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레오폴드 갈축, 흑축, 청축을 주로 사용해보면서 받은 개인적인 느낌은, 체리 갈축은 청축에서 소리를 제외했다기보다는 리니어 스위치에 걸림을 추가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겁니다. 제가 키보드 관련해서는 경험치가 별로 없어서 그냥 이렇게 느꼈습니다만, 조금만 알아봐도 체리 갈축에서 부족한 키압과 걸림을 보충하기 위해 특주축 스위치를 사용하거나 개조하거나 하는 사례가 아주 많더군요.
그래서 '촉각을 이용한다'는 뜻의 택타일(tactile)이라는 용어가 (적어도 체리 갈축에 있어서는) 더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체리 갈축에 관해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고, 특히 레오폴드 갈축에 대해서는 걸림이 굉장히 약하게 느껴진다는 후기가 많았습니다. 사실 다른 체리 갈축 키보드나 택타일 스위치를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 듀가드 퓨전 청축과 레오폴드 청축을 사용해보면서, '레오폴드가 타사 제품들보다 걸림이 덜 느껴지는 편이라, 좋게 말하면 정갈하고 나쁘게 말하면 재미없다'는 후기들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축의 경우 찰칵찰칵 하는 소리도 느낌도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갈축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막연히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레오폴드에 기본 적용된 흡음재와 두꺼운 PBT 키캡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레오폴드 갈축이 주는 느낌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적축이 재미없었던 첫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서 구입한 흑축은 타건음도 아주 좋고, 사람에 따라서는 손목에 무리가 간다는데 저는 그런 걸 느꼈던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구름 타법도 가능하고 걸림이 없어서 오랜 시간 타자해도 손끝이 가장 덜 아픈 키보드입니다. (제 블로그 다른 글들을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저는 기타를 칩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주로 흑축을 사용하게 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잘 안 사용하게 됩니다. 걸림이 없어서인지 이상하게 오타를 정말 많이 치게 되더군요. 강하게 타건하면서 스프링을 끝까지 누르는 느낌도 좋고, 구름 타법을 하면서 외줄타기 하는 것 같은 느낌도 좋은데 뭘 하든 오타를 너무 자주 치게 됩니다. 적축이나 은축은 키보드에 손을 얹어만 놨는데도 입력이 된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아마 영원히 사용 못 할 것 같습니다.
뭐, 그리하여 청축을 꺼내들면 오타율은 줄어드는데 타자 속도는 오히려 줄어듭니다. 키압도 높은 편이고 걸림도 강하다 보니 꾹꾹 눌러서 타자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속도가 줄어드는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찰칵찰칵 하는 소리가 재미있기는 한데,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면 솔직히 정신이 산만해지기도 하고 손끝도 아픕니다.
그래서인지 기분 따라 갖고 있는 키보드들을 돌아가면서 사용하다가도 결국은 갈축을 주로 사용하게 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기계식 키보드 입문용으로 가장 적합한 스위치가 갈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일 주요한 스위치인 청축, 갈축, 적축 중에서 키압도 중간이고, '걸림'이 있다는 점에서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매력을 체험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용해보고 '난 이거보다 좀 더 강렬한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어' 하는 생각이 들면 청축으로, '이거보다 좀 더 얌전했으면 좋겠어' 하는 생각이 들면 적축으로...
가장 인기 많은 스위치가 저소음 적축이기는 합니다만, 이건 필요에 의한 스위치라고 생각합니다. (돌 맞을 소리입니다만) 소음을 줄여야겠다면 굳이 기계식 키보드를 고집하기보다는 러버돔 구조로 되어있고 스프링도 없는 멤브레인 키보드 사용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죠...? 물론 이 의견은 개인적으로 소음 따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환경이라 (키보드 소음이 아무리 커도 기타 소리보다 100배는 조용합니다) 저소음 적축은 애초에 고려 대상에 넣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감안해서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게임을 안 하는데, 걸림 없이 빠르게 연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있으신 분이라면, 걸림 있는 스위치들하고 싸우시기(?) 보다는 그냥 저압 리니어 스위치 사용하시는 게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열심히 글을 쓰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냥 개인마다 취향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고 하니까, 그냥 본인에게 가장 맞는 거 찾아서 잘 사용하시면 되겠다는 뻔한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계식 키보드 여러 대 들이면서 느끼는 건데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저도 한 때는 '키보드 마우스 그거 다×소에서 제일 싼 걸로 사 와도 가나다라 다 입력할 수 있는데 뭐하러 LED 넣느라 돈 쓰냐' 같은 돌 맞을 생각을 하며 살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스위치 종류별로 다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뭔가 타자 연습하면서 ASMR 듣고 싶은 날은 흑축, 1분에 한 번씩 단축키만 쾅쾅 누를 거라면 청축, 오랜만에 블로그에 긴 글 싸질러야지 하는 날에는 갈축... 흠흠...
이상으로 레오폴드 FC900R PD 갈축에 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너무도 간략한 사용기를 마치겠습니다. 제가 경험치가 낮아서 이런 글 써도 되나 부끄럽기는 합니다만, 저처럼 기계식 키보드 막 입문하려고 하는데 하필 코로나가 대유행 중이라 어디 가서 타건 해보기는 부담스럽고 하시는 분들이 우연히 흘러들어와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다음 글은 FC900R OE 흑축에 관해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흑축은 기본 사양이라기보다는 매니악한 스위치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의외로 적축이 역사가 더 짧고 흑축이 원조더라고요. 또, 레오폴드 OEM 높이 키캡 제품에 대한 리뷰가 생각 외로 잘 없던데, 개인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글을 써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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