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은 곧 폐쇄될 예정인 제 네이버 블로그에 2018년 8월 5일 업로드한 글입니다.
※ 당연히 현 시점(2020년 2월 18일)의 저와 과거의 저는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에 쓴 글을 보존하는 의미로 원문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 했습니다. 아래 글을 읽을 때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렉트릭 기타는 본연의 소리가 없는 악기입니다."
이렇게 시작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으신 분도 있을 테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너무 쉽게 납득해버리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연의 소리'가 없다는 건 일렉트릭 기타 레코딩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글은 제 개인의 철학자 흉내 비스무리한 내용을 담고 있고, 리뷰가 아닌 잡담에 가깝습니다. 또한 레코딩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다루지 않고, 그것의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읽기 전에 유의해주세요.
일렉트릭
우선, 이 글에서 다룰 악기의 이름은 '일렉트릭' 기타입니다. 그러니까 '전기' 기타입니다. '일렉트로닉' 기타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전자' 기타가 아닙니다. 말장난 같지만, 이거 의외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전자' 악기는, 신시사이저 키보드와 같이 전원이 연결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즉, 하드웨어 자체로는 악기로서 기능하지 않고, 전원이 연결되어야 소프트웨어적으로 소리를 합성할 수 있게 됩니다.
일렉트릭 기타는 그런 면에서 다릅니다. 물리적인 현의 울림을 전자석인 픽업을 통해 수음해서, 앰프를 통해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소리를 냅니다. 다시 말해 '하드웨어 자체의 소리'가 존재하고, 이것을 '전기적으로' 증폭시키는 방식입니다.
제가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를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 철학적인 측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기가 없어도 일렉트릭 기타는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상관없을 수준으로 별로 없습니다. 사회에서 분리된 완벽한 개인으로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지만, 사회적인 맥락 없이 존재하는 개인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측면에서 인간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전기에 기반한 물질문명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일렉트릭 기타는 자연과 문명에 걸쳐있는 현대의 인간과 가장 닮은 악기라고 생각합니다.
철학 흉내는 이쯤 하고, 중요한 건 이겁니다. 일렉트릭 기타는 현의 울림을 픽업을 통해 수음해 앰프로 증폭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내는 '전기' 악기다.
기타
자, 그러면 왜 일렉트릭 기타가 본연의 소리가 없는지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들은 보통 악기를 여러 대 사다 모으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똑같은 걸 여러 대 사냐고 물어보면, 아마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악기이고 각각의 용도가 있다고 대답할 겁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소프트웨어적으로 소리를 합성하는 악기는, 하드웨어에 상관없이 그 소리를 내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상악기를 불러와서 사용할 때, 어떤 마스터 키보드를 쓰느냐에 상관없이 같은 소리를 내줄 겁니다. 물론 마스터 키보드의 설계에 따른 편의성이나 연주감의 차이가 있다 보니 단순하게 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이건 잊어버리도록 하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일렉트릭 기타는 하드웨어 단계에서, 다시 말해 '현의 울림' 단계에서 소리가 다 다르다는 겁니다.변수도 아주 많습니다. 바디, 넥, 지판에 사용된 목재, 너트 재질, 브릿지, 헤드머신, 연주 방식... 일렉트릭 기타 본연의 소리 비스무레한 걸 굳이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논란이 있겠지만 제 주관적인 의견은 '현의 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비스무레 할' 뿐입니다.
픽업
일단 픽업이라고 썼습니다만, 사실상 현에서 발생한 진동을 수음해서 앰프로 보내기까지에 관여하는 모든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픽업, 콘덴서, 케이블 등등이요.
악기 본연의 소리가 뭘까요? 예를 들어 바이올린이 있다고 칩시다. 활로 현을 마찰시키면 진동이 발생할 겁니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울림통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소리가 증폭됩니다. 따라서 마이크 없이도 꽤 넓은 공간을 채울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소리가 납니다. 저는 이런 악기 자체에서 발생하는, 주변 장치의 힘을 빌리지 않은 소리를 '악기 본연의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녹음을 한 다음 그걸 다시 재생할 때, '어떤 장비로 녹음을 했느냐, 녹음 후 어떤 처리를 했느냐, 그리고 어떤 장비로 재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건 본연의 소리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거 관련해서 깊이 따지고 들면, '듣는 사람 고막과 달팽이관의 왜곡이 있으니 본연의 소리 같은 건 없음!' 같은 주장까지 나오겠습니다만, 상식적인 선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대충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쿠스틱 기타는 전통적인 오케스트라가 확립될 때, 여기에 끼지 못했습니다. 자체 음량이 너무 작았기 때문입니다. 솔리드 바디 일렉트릭 기타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악기의 개선 과정과는 정반대의 발상이 끼어듭니다. 악기 자체의 음량을 키우는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버리고, 전기적으로 이 소리를 증폭시키는 겁니다. 자체 음량이 작아 오케스트라에서 밀려난 기타는, 전기를 만나면서 가장 넓은 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록 밴드의 악기가 됩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기까진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픽업을 장착하느냐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지지만, 아직까진 한 덩어리로 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타와 한 덩어리가 아닌 케이블에 따라서도 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지겠지만, 이 정도까진 들고 다니죠 뭐.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앰프
이제 기타 소리를 증폭시키는 앰프 단계에 이르러서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바이올린의 울림통처럼 일렉트릭 기타와 앰프까지 한 덩어리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신다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만, 눈으로 보기에 기타와 앰프는 각각의 덩어리로 보입니다.
여기서 이미 '일렉트릭 기타는 본연의 소리가 없다'라는 결론이 나와버립니다.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와 앰프라는 악기의 조합으로 오만가지 소리가 나지만, 정작 고유의 소리는 없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진공관'은 원시적인 장비입니다. 이미 트랜지스터를 넘어서 집적회로를 지나 반도체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현재, 툭하면 깨지고, 부피도 많이 차지하고, 수명도 짧은 진공관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소리가 난다는 이유로 음향 장비에서 계속 사용되는 것은, 어찌 보면 웃기는 겁니다. 그 '인간적인 소리'라는 것도 진실을 말하자면 입력 신호가 왜곡되어 출력되는 겁니다.
그래도 기타리스트들은 트랜지스터 앰프를 대체로 방구석 전용 소형 앰프로나 사용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진공관 앰프 특유의 '인간적인' 느낌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트랜지스터 앰프에서 나는 소리가 더 '일렉트릭 기타 본연의 소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타와 앰프가 각각의 덩어리라면, 앰프에 의한 왜곡이 적을 수록 일렉트릭 기타 본연의 소리에 가까워지겠죠.
하지만, 진공관 앰프가 사용되고, 록이라는 장르가 태동할 때, 기타리스트들은 넒은 무대를 소리로 채우기 위해 앰프의 출력 한계를 넘어설 때까지 볼륨을 키웠고, 그 결과 소위 '오버드라이브(Overdrive)' 효과가 발생합니다.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입력 신호가 음향 장비의 출력 한계를 넘어서서 찌그러진 소리가 난다는 뜻입니다.
이 '찌그러진 소리'는 록 음악의 특징이 되어버렸고, 음향 장비가 발전해 깨끗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는데도, 기타리스트들은 여전히 '이거 말고, 찌그러진 소리 나는 원시적인 장비를 갖고 오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현재 진행형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찌그러진 소리 내는 기술'이 꽤 발전했기에 망정이지, 심지어는 앰프를 거의 부숴놓고 공연을 하는 기타리스트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펙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기타와 앰프 사이, 혹은 프리 앰프와 파워 앰프 사이, 혹은 파워 앰프와 스피커 사이에 또 뭔가가 끼어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오버드라이브 효과도 그렇지만, 거의 모든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는 이펙터를 사용합니다. 입력된 신호에 변형을 가해서 독특한 효과를 내는 겁니다.
미쿠 스톰프는 너무 갔습니다만, 아무튼 이쯤 되면 이제 '일렉트릭 기타 본연의 소리'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래, 뭐 관대하게 다 한 덩어리라고 칩시다. 기타랑 앰프랑 이펙터랑 자질구레한 액세서리들까지 다 들고 다니는 건 힘들긴 해도 불가능하진 않으니까요. 그 정도의 연주자라면, '저 연주자 본연의 일렉트릭 기타 소리'라는 개념이 유효할지도 모릅니다.
레코딩
하지만, 결국 다 말장난이 되어버리는 게, 제가 위에서 바이올린의 예를 들면서, '녹음하는 순간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연의 소리가 아니다'라고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럴 거면 '본연의 소리'에 대해 뭐 그리 길게 떠들었느냐?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 자체의 '본연의 소리'는 없어도 '연주자 특유의' 소리는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아노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겠지만, 어쿠스틱 피아노의 '도' 건반을 누르면, 그게 베토벤이든 3살짜리 아이든 피아노 음색의 '도' 소리가 납니다. 거기에 비교하면 일렉트릭 기타는 연주자의 개성이 아주 잘 묻어나는 악기입니다. 물론 피아노도 작곡자나 연주자의 개성이 잘 묻어나는 악기입니다만, 일렉트릭 기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또한 제가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 근데 공연 다니면서 기타랑 앰프랑 이펙터랑 액세서리들 다 들고 다니는 것 까지는 할 수 있겠는데, 레코딩을 해보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집에서 간단하게 '내 고유의 소리'를 녹음하고 싶다면, 그 집이 방음 장치가 되어있는 단독 주택이어야겠죠.
농담입니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타를 컴퓨터에 연결하고, 신호만 받은 다음 각종 프로그램으로 나름의 소리를 만들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혹은 내장 앰프 시뮬레이터와 캐비닛 시뮬레이터가 있는 멀티이펙터를 활용해서 레코딩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럼 됐네! 대체 문제가 뭐야?
하지만, 기껏 열심히 이펙터를 하나 둘 모아서 나의 개성이 잔뜩 묻어나는 페달보드를 짰는데, 이걸 레코딩할 때 못 쓰면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 네, 이게 전부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떠들었습니다.
페달보드를 이용해서 레코딩을 한다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보통 조언을 구하면 "그냥 멀티이펙터 쓰세요."혹은 "다이렉트 박스 같은 걸로 신호만 받고 컴퓨터 프로그램 이용하는 편이 어쭙잖은 실력과 장비 가지고 하드 레코딩 하는 것보다 아마추어 수준에서는 훨씬 퀄리티가 높을 거예요."같은 대답이 돌아올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제가 원하던 대답이 이게 아니잖습니까.
앞으로 몇 편의 글의 걸쳐서 저의'페달보드를 이용한 일렉트릭 기타 레코딩 시행착오'에 대해 다뤄보고자 합니다. 사실, 저도 아직 해답을 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정해진 답이 없기에 매력적인 분야니까요. 어쨌거나 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페달 이펙터를 활용해서', '일렉트릭 기타 홈 레코딩을 하고 싶은'누군가가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까지 오는 데 4년 걸렸거든요. 이 시리즈는 또 얼마나 길어질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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