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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작곡

보랏빛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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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보랏빛이 좋아"
- 황순원, 『소나기』

 

마노 (Mano) - 보랏빛에 관하여 (About Violet)

오랜만의 신곡입니다. 블로그 작곡 카테고리에 글 쓰는 건 반년, 실질적인 신곡을 올리는 건 1년 3개월 만이네요. 

황순원의 『소나기』는 워낙 '교과서적'인 소설이라 아마 모르시는 분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소설에 나오는 '보랏빛'이라는 소재는 정말 교과서적인 복선으로 취급받고 있죠. 그런데 소설을 처음 배울 때부터, '보랏빛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죽을 운명이라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 정도에 황순원 작가 본인이 '그냥 내가 보라색을 좋아해서 별생각 없이 넣었는데, 죽음을 상징하는 복선이 되어있어서 당황스럽다'라는 언급을 했다는 걸 어디서 주워듣고서는 '그럼 그렇지'하고 안심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이 '작가 언급' 자체가 루머더군요. 아무튼 '보랏빛이 좋아'가 복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다시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돌아왔고, '"내가 정말 죽어야만 했는가?" 하는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소녀'를 모티브로 뭔가 만들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질문 상태로 있던 주제가 구체적인 형태로 떠오른 건 2016년이었습니다. (코드 진행 자체는 2013년 말 ~ 2014년 초 사이에 떠올린 것 같긴 한데 정확하게 기억도 안 나고 남겨놓은 기록도 없으니 넘어가고요.) 군생활하던 중이었는데, '대략 40분 정도 되는 대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가 떠오르는 걸 계속 스케치해두고, 휴가/외박 나갈 때마다 녹음해둔다 정도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Sketch] 보랏빛에 대한 단상, 첫 번째

작곡을 하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합니다.

soundcloud.com

'보랏빛에 관하여'라는 제목은 왠지 모르게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위 링크는 2016년 녹음인데, 한정된 시간에 급하게 녹음한 거라 그냥 스케치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퀄리티입니다. 뭐, 이걸 두 번째까지 만들고서 이 프로젝트는 흐지부지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전역을 하고, '이제 난해한 연주곡은 그만 만들자'라고 결정한 다음, 잊고 있던 이 곡을 어쩌다 기회가 되어 다듬게 되었습니다. 그게 2018년 가을이었는데, 관련 포스팅은 이 블로그에도 있습니다. (링크)

 

간략하게 '대략 40분 분량의 곡을 쓰고 싶습니다. 이 곡을 바탕으로 엄청나게 길게 확장된 곡이 언젠가는 나올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무책임하게 써놓기는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3년 만에 곡이 나오면서 이 언급은 복선이 되었네요. 


굳이 밝히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내용이긴 하지만, 이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서 의미 파악해 줄 사람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간략한 설명을 적어보겠습니다. 

일단 소재는 위에서 말했듯 '보랏빛'과 '소녀의 죽음'이고요.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에서 짧은 모티브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미니멀리즘 클래식 비슷한 앰비언트 장르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죽음을 소재로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분위기의 곡을 만들게 되었고, 2016년 사운드 클라우드에 업로드한 <단상>에서부터 계속 공간계 이펙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거대한 종교 시설이 떠오르는 분위기를 만들어왔습니다. '종소리' 또한 처음부터 계속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기타만으로 내려고 하다가 결국 진짜 '종' 소리로 바뀌기는 했습니다만) 이건 물론 종교의식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진짜 제대로 된 미니멀리즘 클래식은 시작도 끝도 파악이 안 되는 반복 구조인데, <보랏빛에 관하여>는 (멀리서 보면 그런 구조일 수도 있겠지만) 땅 속 깊은 곳에서 시작해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 같은 (혹은 어둠에서 시작해 빛으로 사라지는) 구조를 의도했습니다. 


한참 적고 보니 혼자 흥분해서 너무 많은 걸 밝혀버렸나 싶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서 저를 괴롭히던 주제인데 드디어 뭔가 완성된 작품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어서 홀가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이런 거대 규모의 난해한 곡을 다시 만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숙원 사업 하나를 해냈으니, <당신을 위한 이세계행 트럭이 대기 중입니다> 이후 빠져있었던 일종의 작곡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업하면서 이런 연주곡 작업하는 게 의외로 정신건강과 기술 단련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에, 이 정도로 무겁고 장대한 곡까지는 아니어도 소소한 연주곡 작곡을 앞으로 기회 닿는 대로 많이 해보려고 합니다. 

곡을 들어주신 분,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신 분, 혹시 계시다면 정말로 감사드리고요. 의미 있는 경험이 되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작곡자로서 적어도 이 곡이 깊은 울림으로 남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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